‘사람’이 뭐길래...? ‘사랑’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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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뭐길래...? ‘사랑’이 뭐길래...!
지난 주, o시 육아종합지원센터 개인 상담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이제 24개월 된 아이가 불러도 반응이 없고 엄마, 아빠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며, 또래나 사람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관심이 있고 사물들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많이 한다고 상담을 신청해 온 것입니다. 발달검사 결과만 보아도 아이의 상태를 예측할 수 있었으나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니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돌이 되기 전 10~11개월부터 24개월이 되기까지 매일 4~5시간씩 한글, 영어, 수의 비디오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의 언어발달이 빨라지고 집중력을 키워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뭔가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상담을 신청했던 엄마의 가슴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는 ‘비디오 증후군’의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속히 치료를 하지 않으면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갖게 된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근 이러한 환경적인 원인에서 장애 위험에 놓여지는 경우의 상담이 늘어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이 땅에 주실 때에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엄마를 통해 사랑을 느끼게 하셨고, 아빠 ‧ 엄마의 모든 것을 보고 배우며 온전한 인격체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때로 엄마가 원치 않았던 임신을 했거나, 주변의 도움과 지지가 부족해 산후 우울증을 앓으며 아이를 거부할 때, 아이는 자폐스펙트럼장애 또는 ADHD(과잉행동충동장애), 애착장애 등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산후우울증까지는 아니어도 맞벌이나 건강상의 문제로 아이를 양육하기 힘든 환경으로 인해 아이가 조용히 앉아 집중할 수 있는 비디오를 장시간 틀어주는 경우가 많고 그 때문에 비디오증후군의 증세를 보이거나 전반적 발달지체를 보이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담을 하며, 또 실제 그렇게 성장해 자폐스펙트럼장애, 지적장애, ADHD 등의 장애를 갖고 있는 초등학교 아이들과 숲 체험을 하며 최근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은 ‘사람이 뭐길래?’, ‘사랑이 뭐길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폐스펙트럼장애 아이들의 특성중 하나는 사람이 아닌 사물에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는 소통이 되지 않으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한 사물에는 유난히 집착하며, 마치 사물과 대화하는 것 같은 특이한 모습까지도 보이곤 합니다. 사람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아 안타깝게 하며, 말을 하지 못하고 집중도 하지 않지만 나중에 보면 자신의 수준만큼 알아듣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이 아이들은 사랑을 못 느낀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고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보아서는 중증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그 사람을 보면 나름 반가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그 사람의 말을 더 잘 따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초등학교 특수학급 아이들과 숲 체험 활동으로 작은 화분에 강낭콩 씨앗을 심은 후 집으로 가져가도록 했는데 지적장애를 갖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이거 가져가도 엄마가 안 좋아해요.”라고 말하며 잘 들고 가던 화분을 길거리에 버리는 것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지만 좋아 하실 수도 있을 거야”라고 말해주고 내가 주워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드는 생각은 ‘이렇게 느끼도록 한 엄마의 양육태도로 인해 이 아이가 지적장애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어머니의 의사소통 유형과 아동의 발달수준에 관한 상관연구(Mahoney, 1988; Mahoney & Robenalt, 1986; Maurer & Sherrod, 1987; Petersen & Sherrod, 1982)’들을 보면, 정신지체 아동과 비 지체아동 그리고 그의 어머니들과 비교할 때, 정신 지체아동의 어머니들은 보다 더 ‘지배적인 대화’를 하였고, 아동의 행동을 ‘지시하거나 통제’하는 언어를 더 많이 사용하였으며, 아동의 의사 표현과 행동에 대한 반응은 적었다는 결과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삶은 분명 더 풍요로와지고 놀라울 만큼 편리하게 빠르게 발전해 가고 있는데, 그러한 햇빛의 그늘에는 아프고 멍들어가는 ‘사람’들의 ‘정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저 살아가기에 바빠 때로 그 중요성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죽기까지 자녀(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보여 주셨으며,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복음 1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명이 발달 할수록 성공한 사람들은 자만심에 도취되어 상대방의 마음 상태를 헤아리기 어렵고, 실패 한 사람들은 열등의식 속에 갇히게 되어 서로를 사랑하기에 점점 심한 괴리감을 느끼게 되어 가는 듯합니다.
때문에 아이들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엄마들은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기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잘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 또는 책임감을 병적으로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도 양육스트레스로 힘겨워하며 우울 또는 무기력감까지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을 향해 심하게 통제 또는 압박을 가하기도 하는 양육태도를 보이며,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다시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내 아이는 나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과도하게 커져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반대로 과잉허용의 양육태도 또한 아이들을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열등감은 비교에서 온다고 합니다. 1992년 올림픽 중계 자료를 조사해 은메달과 동메달을 받은 선수들이 메달이 확정되는 경기 종료 순간에 지은 표정을 분석한 결과 놀랍게도 동메달을 딴 선수들이 은메달을 딴 선수들보다 훨씬 행복한 표정을 많이 지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은메달을 딴 선수들은 금메달을 딴 선수들과 비교해서 아쉬움과 실망감으로 은메달의 가치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동메달을 받은 선수들은 자칫했으면 메달을 따지 못할 수도 있었던 상황과 비교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동메달에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기준을 남에게 두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하든 못하든 게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교를 한다면 과거의 자기와 비교해 현재의 자기가 얼마나 향상되어 가고 있는지, 자신이 꿈꾸는 미래의 자기를 생각하며 현재의 자신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를 비교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2011. 서울대학교 행복센터)고 합니다.
열등감은 내가 갖고 싶어서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어디에 숨어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때로는 내게 있는지조차 모르는 가운데 나와 평생을 함께하고 있는 동반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열등감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살기 위한 열쇠는 바로 자신의 열등감을 인정하고 주님 발 앞에 털어놓고 고백하는 것이다(최원호 서울한영대학교 겸임교수, <열등감, 예수를 만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열등감은 생각보다 무겁고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는 악마일 수 있다고도 합니다. 열등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면,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까지 서서히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알프레트 아들러는 열등감을 끊임없이 자신을 성장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정신적 에너지’라고 말했습니다. 실제 그의 삶에서 열등한 신체조건과 질병, 그리고 중학교 때는 수학성적이 좋지 않다고 교사가 아버지에게 학교를 중퇴시키고 구두 만드는 일을 가르치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까지 들을 정도였지만, 자신의 그러한 열등감을 에너지로 승화시켜 심리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심리학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 6개월여 동안 나와 개인 상담을 하고 있는 한 청년은 초교 때 5번의 이사와 고등학교 때 5번의 뇌수술을 거치며 엄마의 말로는 어릴 때는 매우 활발했었다고 하는데 고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위축과 무기력함을 보이기 시작해 상담을 신청한 케이스입니다. 매주 만나 상담을 하다 보니 이 청년의 위축과 무기력함 에 가리워져 있는 명석한 두뇌와 차분한 성격, 박학다식한 일반상식들, 꼼꼼하고 섬세한 손재주, 상대방을 배려하는 착한 마음 등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자신의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닌, 순전히 환경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의 연속으로, 공부를 제법 잘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또래 아이들과 같이 대학진학을 할 수 있었던 여건이 되지 못했었던 것이 자신에 대한 지나친 열등감을 키워주었고 주변의 기대에 미칠 수 없다고 느낀 스스로의 생각은 커진 열등감에 불을 붙여 위축과 무기력으로 가라앉게 만든 것이라 보여 집니다.
상담을 하며 “네 잘못이 아니야” 아무리 말로 해주어도 지금은 아무런 느낌도 없을 것이고 그저 스쳐가는 메아리같이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야’, ‘나는 사랑받을만한 사람이야’ 라는 믿음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즉, 격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끊임없이 신뢰를 보여주며, 스스로 자신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돕고 나서, 무엇인가 해보려는 노력과 현재 가지고 있는 청년의 능력을 진심으로 믿어 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시며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며, 하나님은 실수하시지 않는 분이시다.’라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청년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도 했지만 상담을 할 때마다 기도도 하고 미술치료를 하며 예수님의 모습이나 성경책, 오병이어, 강대상 등의 그림을 그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어느 날 상담 중 “OO에게 하나님은?”이라는 질문을 하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바로 “없는데...”라고 답하는 것을 들으며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믿음이 없다는 거야? 하나님이 없다는 거야?”라는 나의 질문에 즉시 “둘 다요...”라는 답을 듣고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고등학교 시절에 5번이나 장시간에 걸쳐 뇌수술을 했어야 하는 상황에서 새벽예배까지 나가며 수술은 제발 하지 않게 도와 달라고 애타게 기도했었는데 결국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이 청년은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며 분노를 잠재우고 스스로를 위로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기 어려워지고 아무런 의욕도 열정도 사라지는 것은 어쩜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강한 부정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 믿음과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을 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분노의 표현인 것이지요. 어쩜 이러한 분노의 표현이 바닥까지 드러날 만큼 모두 쏟아 낸 후에는 다시금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개념이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되게 될 것입니다. 그 시기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에 감사한 것은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하고, 하나님은 분명 OO에게 주신 달란트(강점)들을 필요로 하시어 그것들을 반드시 쓰실 계획이 있으실 것이며, 그 계획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말과 함께, 진실한 사랑으로 격려하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며 그로 인해 다시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맨 처음 언급했던 24개월 아이의 엄마 역시, 엄마로서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부분을 상기시키며, ‘내가 아이를 잘못 키웠다’는 죄책감이 아니라 지금 현재, 또는 앞으로도 계속 아이에게는 엄마의 사랑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힘을 얻도록 격려해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어느 엄마 내담자의 경우는 아이들을 많이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환경이 너무나 힘든 상황에 있음으로 인해, 상담 초기에는 불안감과 우울감이 높아 많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도 짜증을 내는 모습이 많다고 했었는데, 상담을 진행하며 내담자가 갖고 있는 장점과 과거 행복했던 시절들을 미술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들이 쌓이자 상황은 변함이 없는데 스스로 상황을 풀어나갈 만한 자신감이 생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 있게 이야기하게 되었다며 활짝 웃는 표정을 보았습니다.
이렇듯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각기 다른 연약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즉 ‘사람들의 사랑’을 먹지 않고서는 온전하게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을 아무리 최첨단으로 내달리는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할지라도 하루 한 시간, 아니 단 몇 분 만이라도 기억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에게 긍정적이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진실한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내 곁에 누군가 타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있음을 인정한다면,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원망, 불평, 방어 등의 ‘멀어지는 대화’가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며 존중하고 수용 ‧ 공감의 ‘서로 다가가는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바로 내 곁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너를 믿는다.’, ‘감사합니다.’ 등의 긍정적인 표현을 아낌없이 부어주는 사랑을 나눔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복한 날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좌충우돌 부딪히며 넘어졌다 다시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초보 상담자로서 내가 먼저 경험한 아픔들이 나를 만나는 내담자들을 진실한 사랑으로 보듬어 안아 줄 수 있는 밑거름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사람’과 ‘사랑’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고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기 바라는 작은 마음을 시작으로 나부터 실천하자는 다짐을 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2017. 7. 4
이 종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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