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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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우리 교회에 경사가 났다.
올해 쉰 살이 된 전도사님이 아들을 낳은 것이다.
연초,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목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직 부모님에게도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어찌해야 좋을른지 몰라 목사님께 상의 드립니다. 제 아내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어찌하다니요? 축하드립니다. 대단하십니다. 그 아이는 참으로 복된 아이입니다’ 그런데 벌써 엊그제 출산을 하였다.
출산 당일 병원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쉰둥이 아빠가 된다는 것이 쑥스러우면서도 그 얼굴 표정에는 함박웃음이 역력하다. 그렇기도 할 것이다. 위로 멀찌감치 딸이 둘이나 있는데 늦둥이로 아들을 보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연실 싱글 벙글 이다. 양가 부모님들도 아들 손주를 낳았다하여 경사가 났단다.
요즘 젊은이들은 딸 둘만 있어도 크게 상관하지 않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는 좀 다르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으시지만 아들 손주를 낳았을 때 반응을 보면 얼마나 아들 손주를 기다리셨는지 알 수 있다. 덩실 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으실 것이다.
어쩌면 벌써 애기가 눈을 맞추고 방긋 방긋 웃으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알아본다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거짓자랑을 늘어놓고 계시지 않을까, 전도사님은 늦깎이 신학생 신분으로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이지만 그보다는 본인의 아들을 만나는 일이 훨씬 더 소중한 일이기에 분만실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는 부친께서 48세에 낳으셨다. 딸 부잣집(딸 여덟)에 중간에 아들하나 끼어 있고 열 번째 막내로 아들이 태어났으니 우리 집안에서도 대단한 경사였을 것이다. 내 기억의 태초로부터 시작하여 부모님에게 한 번도 매를 맞아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해 왔다. 많은 누나들 틈바구니에서 품에서 품으로, 발에 흙이 묻지 않을 정도로 안기고 업혀 자랐다.
부모 형제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서일까? 내 마음속에는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없다. ‘나는 자라면서 부모님에게 야단 맞아본 경험이 없다’고 말하면 아내는 덩달아 ‘당연하지요. 48세에 아들을 낳으셨으니 어찌 야단을 치시겠습니까?’ 긍정반, 빈정댐 반으로 응수하며 자기도 야단 한번 맞지 않았다며 한마디 덧붙인다. ‘나는 호롱불 기름닳는다고 공부 그만하라고 야단 맞아본 기억만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태어난 처지가 비슷한 이 아이에게 더욱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가는 것이다. 나는 불신가정에서 태어나 육친의 사랑만 받고 자랐지만 이 아이는 성령으로 거듭난 부모님과 조상의 믿음을 이어받으며 태어났으니 얼마나 축복된 아이인가,
잉태된 순간부터 이 아이를 축복하며 기도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 부럽기만 하다. 전도사님은 늦게 주님을 영접하고 그 은혜가 너무나 고마워 이후 본인의 삶을 주님께 헌신을 하였다. 열심히 공부하며 열정을 가지고 청년 사역을 하는데 있어 그 모습이 하나님보시기에 얼마나 사랑스러우셨으면 이처럼 귀한 아들을 선물로 주시면서 위로하실까?
많은 기도속에 태어난 사무엘처럼 귀하게 쓰임받는 인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