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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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차든지 가장 빠른 것으로 주세요’
그렇게 하여 받아든 표는 무궁화 호 입석이었다. 상관없다.
쫓기는 시간을 메우려면 앉아가든, 서서 가든 도착시간은 동일하기에 일단 트랩에 올랐다. 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 했던가? 기차에 오르고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므로 지친 상태인데 어떻게 다시 한 시간을 서서 간단 말인가? 무조건 객실 안으로 갔더니 의외로 빈자리가 많이 있질 않은가, 옳거니 생각하고 나란히 비어 있는 자리 한쪽에 가방을 놓고 옆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빈 의자는 앉는 사람이 임자라 했겠다. 몸의 피곤이 좀 풀리는 듯 했다. 하지만 사실은 내 자리가 아니기에 이제 손님들이 그만 타고 빨리 기차가 떠나기를 바랄 뿐이다. 마침내 손님들이 모두 자기 자리를 찾아 앉은 다음 기차는 스르르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하자 안도의 한 숨이 나온다.
10분 쯤 지나자 기차는 다음 역에 도착하였다. 왜 이리 구간이 짧은 거야? 내리는 사람, 오르는 사람, 자기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로 잠시 혼잡스럽다. 혹시라도 내가 앉은 자리 주변에서 번호를 확인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조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태연한 척 하면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 자리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이 기차는 다시 출발한다.
아, 이번에는 구간이 좀 길었으면 좋겠다.
책을 꺼내 놓고 볼 여념이 없다. 혹시라도 승무원이 와서 표를 확인하는 건 아닐까? 급하게 타느라고 멀리 있는 객차를 탔던 사람이 자기 번호를 찾아 몇 칸 건너 찾아와서 내 자리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잠을 잘 수도 없다. 욥3:25에 보면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라는 말씀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어쩌면 내 생각이 그리도 정확할까, 기차가 플랫폼을 빠져나와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두 사람이 내 옆에 오더니 표를 들고 자기 자리를 확인하고 있는게 아닌가? 들어보니 내가 앉은 자리 주인이다. 나는 그들이 말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서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여기 앉으세요’ 말하고는 뒤통수를 보이며 얼른 다른 칸으로 이동하여 버렸다.
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객차와 객차 사이에 좀 넓은 공간이 있어 잠시 서 있고 보니 그곳은 냉방이 되지 않아 덥고 답답하다. 가방을 메고 다음 칸으로 갔다. 입구에 ‘카페’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아, 여기가 기차 카페구나, 그럼 여기서 음료수라도 한 병 사 마시면서 시간을 떼우자‘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데 웬걸, 그 안에는 이미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입석표를 받아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원하기는 했다. 기차 카페이고 보니 창 쪽을 향하여 기다란 의자가 놓여있고 거기에는 사 먹지도 않으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가 빨리 일어날 사람인가?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는 사람, 짐 보따리를 챙기는 사람, 창밖을 내다보면서 내릴 장소를 확인하는 사람, 마치 간첩을 식별하는 것처럼 앉아 있는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가방을 챙기는 사람 뒤에 서 있다가 다음 역에서 내린 그 자리에 얼른 앉았다. <아, 여기가 내 자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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