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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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동안 선교지를 돌아다니면서 계속 마음속에 드는 의문은
과연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개인으로 따지면 200여만 원에 보름이라는 시간, 육체적인 작은
노동에 불과하겠지만 이게 수 십명, 수 백 아니 수 천명이라고
할 때는 계산이 달라진다.
전 세계에 흩어져 동일한 사역을 하고 있는 수 천, 수 만명의 사역자들을 놓고 계산하면 이는 천문학적인 숫자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 과연 효과적일까? 지나친 낭비가 아닐까?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어마 어마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마치 예수님 발에 비싼 나드 향유를 부어버린 여인을 향하여 비난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같다. 이게 값으로 따지면 얼마가
될텐데, 그걸 모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아할 텐데, 그 비싼 걸 발에 부어버리다니, 그리고 예수님은 그걸
말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을 하시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보름동안 I.P 선교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전도책자를 나눠주는 일을 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이 마을 저 마을 걸어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려 애썼다.
그 곳 사람들은 순박하고 착하기 이를데 없다. 낯선 이방인들을 보면 반가워하며 다가온다. 대부분 사람들이 처음 보는
우리를 불러 들여 차 대접하는 걸 좋아한다. 먹을 것을 내온다.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마치 4ㅡ50년 전 우리나라 시골 풍경과 흡사하다.
한 집에 아이들이 7,8명이 되지만 밤이 되면 아이들을 한 방으로 몰아넣고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방을 비워준다. 정이
많은 민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면 자기들은 무슬림이라고 정색을 하며 거절한다.
그런 경우에는 정중하게 책자만 건네주고 나중에 읽어보라고 전한다.
만난 사람 중에 예수님을 믿겠다고 영접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과연 이게 옳은 방법인가?
1866년 우리나라 대동강에서 성경책 한권 건네주며 참수를 당했던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가 생각났다. 26세 젊은 나이에
그는 우리나라 땅에 발도 디뎌보지 못한 채 자기를 죽이는 사람에게 성경책 한권 던져주고 순교를 당하게 된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성경책 한권 전해주는 것이 과연 자기 목숨과 바꿔도 좋을만큼 가치 있는 일일까?
그런데 역사는 그 가치를 인정해 준다. 그를 죽였던 사람이 나중에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고, 그 책은 비록 찢겨져 도배가
되었지만 그 집이 평양 최초의 널다리 교회가 되고 훗날 장대현교회가 되어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그가 피를 흘리고 죽었던 자리에는 지금 평양 과학기술대학이 세워져 많은 외국인 교수(신분은 선교사)들이 그 자리를
지키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 한 사람의 희생과 책 한권 전해줌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꿔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소비적인 일이 훗날 얼마나 가치 있게 열매를 맺을 것인가? 생각하니 거룩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이 변화되고, 한 민족이 변화되는 거룩한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이다. 비록 돌짝밭에 떨어지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떨어져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디에선가 옥토에 떨어진 씨앗이 있다면 최고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 믿음으로 볼 때 거룩한 씨앗은 계속 뿌려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