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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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는 것
두 주전 용천노회 소속 기도목회 동지회 목사님 부부 수련회가 여수에서 있었습니다.
연 초에 부흥집회 갔던 교회 장로님이 소식을 들으시고 일행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딸과 사위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맛있는 양고기 요리를 대접받았습니다.
대화하는 중에 오른쪽 팔이 아파서 여러모로 치료하고 있지만 소용없고 오랫동안 고생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수요 저녁 예배 후에 기도하자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환자 치유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많이 경험했기에 이번에도 동일한 은혜를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약속하였습니다.
다음 날 일행과 함께 외출하다가 비에 젖은 계단에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물기 있는 계단을 보면서 조심해야겠다 판단하고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디뎠음에도 비에 젖은 계단에서 슬리퍼는 스키처럼 미끌렸습니다. 그 순간 난간을 잡고 있던 우측 어깨가 뒤로 돌아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한동안 꼼짝 못하고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동료들이 ‘괜찮느냐’ 묻는데도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이들 <얼음땡>하는 것처럼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X-ray 사진을 찍고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고 인대가 늘어나서 한동안 고생하겠다며 약을 줍니다.
수요예배가 마치고 나니 오른쪽 팔 아프신 장로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오른쪽 팔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계속되었지만 기도하기로 약속했기에 만났습니다. 그 분이 오히려 내 걱정을 더 많이 합니다.
그때 ‘장로님의 고통을 친히 느끼면서 기도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라고 얘기하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고통이 내 고통이 되고 내 고통이 그의 고통이 되는 일체심을 가지고 기도하였습니다.
한쪽 어깨를 사용하지 못하는 불편함이 얼마나 큰지 두 손들고 축도를 할 수 없습니다. 옷을 입고 벗을 때마다 여간 불편한게 아닙니다. 새벽 예배 때 와이셔츠를 입고 양복을 입는 것도 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젠 큰일이 되었습니다. 넥타이를 맬 수 없어 목회자셔츠를 입습니다. 샤워를 할 때도 한 손만 사용하는게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며칠 동안 어깨 고통을 느끼면서 몸에 장애를 입고 사시는 분들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십여 년 전 뇌출혈로 지금까지 반쪽을 사용하지 못하는 누님이 계십니다. 누나를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나옵니다. 얼마나 고생했을까? 얼마나 삶에 좌절감을 느꼈을까?
누구 못지않게 착하고 건강하게 생활했던 누나가 어느 날 느닷없이 응급실에 실려간 뒤로 지금까지 방안에서만 생활하고 있으니 그 심적 고통과 삶의 절망감이 얼마나 컸을까?
평생 옆에서 수족 노릇을 하고 계시는 매형의 손길이 얼마나 귀한지 깨달아집니다.
건강할 때는 연약한 자의 고통을 모릅니다. 아는 척 할 뿐입니다. 그렇게 이해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겉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교회 안에 몸이 불편한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 요청해 올 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지만 이제는 느낌이 다릅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잘 이겨 내고 있음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體恤-처지를 이해하여 불쌍히 여김)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히브리서 4:15).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지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몽땅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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